2021 9. 15 묵상나눔(X2, 한영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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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15
바이블타임 묵상 (한영대조, X2버전)
성경범위: 사무엘상 15장, 요한복음 3:16-21
오늘의 한 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요3:16)
오늘의 말씀은 성경의 말씀 중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해 주는 말씀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신앙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혀주는 말씀이다.
16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왜 보내셔야 했는지?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들이 그 예수를 통해 어떤 유익을 얻기를 바라시는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기록하고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이다.
그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영생을 주기 위함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사망의 어두움으로부터 빛이신 예수께로 가까이 가며 영생을 소유한자 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그 사망의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니 이미 그 죄의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벌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한 생명이라도 더 영생에 이르게 하심이다.
나의 개인적인 신앙과 신학으로는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의 신앙이고 믿음의 근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생의 확정을 늘 구하고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삶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나의 기도는 무엇을 구하는 기도인가?
나의 삶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가?
늘 나의 기도의 중심은 이 땅에서의 삶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땅에서의 풍요와 안정과 평안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당시의 핍박받는 히브리 기독교인들에게 순교도 핍박도 기쁨으로 감당하라고 격려 하면서 배교의 행위는 핍박도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똑바로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 하고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목회자들은,
성도들은,
예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믿고 싶은 예수는 어떤 예수일까?
내가 포장해 놓은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내 필요를 채워주는 마법의 요술 램프인가?
예수는 이 땅에 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오셨다.
그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에 추악한 나의 욕심의 옷을 입히지 않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
예수를 믿어 심판을 받지 안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 생명 주신 예수를 믿는 것이지
요술 램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님을 또 한 번 되새긴다.
바이블타임 묵상 (한영대조, X2버전)
성경범위: 사무엘상 15장, 요한복음 3:16-21
오늘의 한 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요3:16)
오늘의 말씀은 성경의 말씀 중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해 주는 말씀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신앙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혀주는 말씀이다.
16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왜 보내셔야 했는지?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들이 그 예수를 통해 어떤 유익을 얻기를 바라시는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기록하고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이다.
그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영생을 주기 위함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사망의 어두움으로부터 빛이신 예수께로 가까이 가며 영생을 소유한자 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그 사망의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니 이미 그 죄의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벌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한 생명이라도 더 영생에 이르게 하심이다.
나의 개인적인 신앙과 신학으로는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의 신앙이고 믿음의 근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생의 확정을 늘 구하고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삶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나의 기도는 무엇을 구하는 기도인가?
나의 삶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가?
늘 나의 기도의 중심은 이 땅에서의 삶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땅에서의 풍요와 안정과 평안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당시의 핍박받는 히브리 기독교인들에게 순교도 핍박도 기쁨으로 감당하라고 격려 하면서 배교의 행위는 핍박도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똑바로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 하고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목회자들은,
성도들은,
예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믿고 싶은 예수는 어떤 예수일까?
내가 포장해 놓은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내 필요를 채워주는 마법의 요술 램프인가?
예수는 이 땅에 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오셨다.
그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에 추악한 나의 욕심의 옷을 입히지 않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
예수를 믿어 심판을 받지 안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 생명 주신 예수를 믿는 것이지
요술 램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님을 또 한 번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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